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해군의 폭주 ==== >호전적으로 흥분한 해군중앙의 움직임에 직면하여 해군도 점점 포악해져간다. >----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이타로, 이시이 이타로 일기 8월 13일자. 한편 중화민국의 논의와는 별개로 일본에선 중화민국을 남북으로 협공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난징-상하이 공격 계획이 논의되고 있었다. 원래 육군과 중앙정부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지적 해결을 원했으나 해군은 군령부에서 책정한 '대지나작전 계획내안'에 의거하여 전면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7월 16일 일본 제3함대 사령관 하세가와 기요시가 '대지나작전 용병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무력을 사용한 일지관계[* 일본-지나 관계, 즉 중일관계.]의 현상 타개 대책은 지나 응징. 즉 현 지나 중앙세력의 굴복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전역국한 작전은 적의 병력 집중을 도와, 작전을 어렵게 할 우려가 있다. 적의 급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상하이와 난징을 제압하는 것이 급선무다. >---- >대지나작전 용병에 관한 의견 이를 위해 하세가와 사령관은 육군 5개 사단을 상하이에 상륙시켜 점령, 이후 난징까지 진격하자는 입장이었고 참모본부는 7월 29일, 이러한 해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하이-칭다오를 다음 공략 목표로 삼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여기서 얘기를 더 거슬러올라가면, 당시 일본군 내부에는 소련을 주적국으로 삼자는 육군의 북진론과 영미를 가상적국으로 삼자는 해군의 남진론이 대치하고 있었다. 제국 국방방침에는 육군의 전략이 채택되어 소련을 주적국으로 상정하고 있었으나 하세가와 기요시를 비롯한 해군의 강경파들은 제국 국방방침 개정을 외치고 있었다. 해군은 1936년 중일 전면 전쟁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이미 대중 임전태세를 다지고 있었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 주요 도시에 대한 공습과 중국 연안 봉쇄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중국 해군기지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적극적 전면작전을 실시, 해군의 실적을 일본국민들에게 과시하여 해군 예산을 늘려 군비를 확장하여 미해군에 대항할 수 있는 군세를 갖추려 했다. 또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은 항공모함의 부산물 정도로 여겨지던 항공전력을 독립시키고 항공군비 확충, 전력 개발 등을 꾀하며 항공주병론을 제기, 전함주병,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파와 대치하였는데 중일전쟁은 항공주병론자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중요한 실험장이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1932년 제1항공전대사령관 시절부터 "융통성없는 철포옥[* 일본 제국 해군 속어로 포술 관계자를 말한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항공이 실적을 보여주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다."라고 말해왔는데 그가 해군 차관이 된 상황에서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해군은 당장 중국에 대한 대규모 항공 작전에 돌입하여 상하이, 난징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